량쓰청(梁思成): 건축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From:금교Author: 2023-12-15 13:43

 건축학자 량쓰청은 “건축가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그들은 문화의 기록자이자 역사의 거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 인생의 진솔한 모습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량쓰청 하면 린후이인(林徽因)과의 사랑, 량치차오(梁啟超)의 아들인 것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의 건축 영역의 성과는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조국의 영토를 침탈당하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시절에 그는 ‘중국인의 건축사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 고건축 연구와 보호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후, 중국 건축학과의 개척자이자 창시자, 그리고 건축 역사, 문화유산 보호, 도시 계획, 풍경 정원 등 학과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건축사(中國建築史)>와 영문판 <중국건축사도석(中國建築史圖釋)> 두 걸작을 완성하고 중국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1901년, 량쓰청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부친 량치차오는 ‘쓰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아들에 대한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순조롭게 칭화학교[淸華學校, 전신은 칭화학당(淸華學堂)이었고, 1912년 칭화학교로 개칭되었으며 현재는 칭화대학교다]에 입학했다. 재학 기간 동안, 그는 우수한 성적 뿐만 아니라 음악, 회화(繪畫), 디자인 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920년, 19세 나이에 왕궈웨이(王國維) 기념비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1924년, 량쓰청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건축학과를 전공했다. 유학하는 동안, 그는 서양 건축사에 많은 관심을 자져 도서관에 가서 수많은 책을 읽고 고대 문물을 감상하며 유명한 고건축을 하나하나 그려보곤 했다. 어느 날, 한 교수가 그에게“중국에 건축사에 관한 저서나 연구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교수의 이 질문으로 그는 중국 건축 연구의 여전히 공백 상태를 깨닫게 되었다. 대학 2학년 때, 그는 부친 량치차오가 보낸 고대 건축 저서 <영조법식(營造法式)>을 받았는데 이 저서는 당시의 그에게는 천서(天书, 난해한 문장이나 알아보기 힘든 문자)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영조법식>을 해석하는 것이 량쓰청의 꿈과 추구가 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 건축사 연구에 대한 열망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초기의 스케치, 평면도, 입면도, 투시도를 반복적으로 연습한 다음 마지막으로 한 건물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추적했으며 건축학을 더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1928년, 학업을 마친 뒤, 그는 귀국하고 중국 고건축 연구에 뛰어들었다.

 건축 연구에 대해 그는 실질적인 지적조사와 측량 작업을 꾸준히 견지했다. 그러기 위해 그의 발자취는 중국 곳곳에 남겼다. 특히, 1930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아내 린후이인과 함께 중국의 200여 개 현(縣)을 돌아다니며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 등 왕조의 고대 건축 유적지 2700여 곳을 측량하고 촬영했다. 그 과정에서 건축물 설계도와 사진을 포함한 고대 건축 기록을 만들고 일련의 학술 논문도 발표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대에 오랫동안 야외에서 지적조사와 측량작업은 시적이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붐비는 장거리 버스와 딱딱한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기도 했고 길을 막은 강도와 도망치는 군벌도 만났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지만 그는 이 일을 하나의‘사치스러운 행복’으로 여겼다.

 또한 건축 교육 사업의 발전에 그는 큰 기여를 했다. 1928년 가을, 국립동북대학교 건축학과장을 지낸 량쓰청은 중국에서 새로운 건설자를 양성하는 데 전념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량쓰청은 전후 평화 건설에 인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기 졸업한 학교인 칭화대학교로 돌아가 건축학과를 설립했다. 오랫동안 교육직에 종사한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교육 현장 최일선에 서고 있었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전문적인 기초 지식 함양을 매우 중시하며, 중국과 외국의 건축사를 가르치는 것외에도 수업에서 과외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주변 건축물을 깊이있게 관찰하도록 교육하고 지도하며 학생들이 건축 사업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우고 건축 전공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 기간, 뛰어난 재능과 깊은 학술 조예로 미국의 여러 대학교가 그를 미국으로 강의하고 근무해 달라고 초청하며 훌륭한 대우도 약속했다. 그러나 량쓰청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중국에 남아 교육자로서 계속 일하기로 했다.“우리 조국은 지금 재난 중에 있습니다.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총검과 폭탄에 죽는다면 조국 땅에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건축학 저서에서 1946년 그는 최초로 영문판 <중국건축사도석>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교수는“중국 건축 속에 숨겨진 광채와 구조 원리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로 이 저서를 완성했습니다. 외국인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자신의 전공에 대한 성취는 비길 데 없이 뛰어납니다.”라고 평했다. 가시덤불이 우거지지만 멋진 인생 길에서 량쓰청은 중국인민영웅기념비의 디자인에 참여하는 또 다른‘빛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국가와 인민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영웅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비땀을 흘리며 전전긍긍하고 대담하게 이 일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량쓰청은 기념비 디자인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칭화대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이끌고 고금동서의 디자인 영감을 받아 기념비 외관의 크기, 비율 및 곡선 측면에서 많은 세심한 작업을 수행했다. 디자인 작업에 더 잘 하려고 하는 태도를 통해 마침내 기념비의 조형은 가능한 한 완벽한 형태로 나타나게 됐다.

 1972년 1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20세기의 전설적인 건축학자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남긴 것은 책 한 권, 건축물 한 채, 미담 한 토막 뿐만 아니라 험난한 세월에도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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